# 1.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나름 연극을 자주 많이 보는 편인데 그 덕력(?)이 짧은 탓인지 아직도 모르는 유명한 작품들이 많은 듯 하다. 이 연극도 처음 들어보았는데 나중에 찾아서 살펴보니 어머한 작품이었다. 중국 내에서 700년 동안 사랑 받아온 역사극이고, 2016년 동아연극상, 대한민국연극대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 3, 올해의 공연 베스트 7 등 내로라 하는 국내 연극상을 휩쓸었던 연극이란다. 게다가 공연 후 알았는데 그 유명하다는 고선웅 연출작이라니!
다행히 아무 배경정보 없이, 기대감 없이 가볍게 보려했기에 그 감동과 여운 더 큰 듯하다. 공연을 보는 동안 계속 뭐지뭐지 하다 마지막 묵자의 대사에서 한번 무너져 내리고, 프로그램 북에서 넉다운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래는 공연에 대한 기사 및 관련 정보
http://premium.mk.co.kr/view.php?no=17572
인간은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판단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긴다. 그게 바로 ‘명예’다. 이는 인간만의 특성으로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토록 복수를 부탁하며 죽어간 자들이 막상 복수가 끝났는데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복수를 완수한 정영에게 웃어주지 않는다. 죽은 자들이야 이미 죽었는데 복수를 했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영도 마찬가지다. 복수는 했지만 그렇다고 죽은 아내나 아들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도안고의 대사다. “미련해. 한없이 미련해….뭐 하러 그랬어? 다 늙어버렸잖아? 네 인생은 도대체 뭐였어? 왜 씁쓸해? 하하하.
“이 이야기를 거울 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묵자) 마지막 나비를 들고 나타난 묵자의 마지막 대사가 관객의 가슴 깊이 울린다.
극을 보고 나면 남는 건 순간의 격정이 불러일으키는 ‘눈물’이 아니라 오래오래 긴 여운을 남기는 씁쓸한 ‘한숨’이다.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592840
이 작품만큼은 진부함을 특별함으로 만든다. 고선웅 연출은 인물과 주제를 과장하고 해학을 곁들인다.
휑한 무대지만 필요할 때마다 소품이 천장에서 오르내린다. 독특하고 무모한 연출이지만 관객의 집중을 극도로 높인다. 연출은 배우의 연기에만 집중하라고 관객에게 다소 과격하게 권고한다. 배우는 연기로 응답한다. 난해한 방백과 과장된 몸짓까지 매끄럽게 소화한다.
# 2. 프로그램북
아직 연극을 온전히 이해할 그릇이 못되어 그런지, 연극을 본 후 프로그램북을 통해 알게 되는 연출의 의도와 대담은 또 하나의 재미이자 감동이다. 이번 작품은 더욱 그랬다. 공연 후 집 근처 호프집에서 노가리와 맥주를 마시며 본 프로그램북의 여운은 아직도 기억난다.
복수라는 소재 역시 마찬가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받은 대로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어린 마음을 가졌을까요. “너는 사과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주지 않겠다. 이것은 미움이다. 너는 사과를 주지 않았지만 나는 사과를 준다. 이것은 증오다” 라고 쓴 책이 기억납니다. 그야말로 멋진 증오이자 복수 아닌가요.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부디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필요하다면 복수는 해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주제다. (중략) 복수는 결국 또다시 복수의 씨앗을 뿌린다. 되풀이되어 온 역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까지나 이런 우환을 경험하지 못한 내 생각에는, 당장 해결하기는 절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노가 가라앉고 세월이 가고 이해당사자들의 시대가 끝이 나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더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 누군가는 복수의 순환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어느 곳에서는 또 다시 복수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을 것이다.
‘베갯머리가 시끌시끌할 줄 알았는데, 너무 조용하더라. 그래서 더 잠이 안 왔다’며 도안고는 자신의 불편했던 삶을 회고한다. 정영 또한 복수 후에 허탈감을 느낀다. 욕망을 쟁취하면 금세 또 다른 숙제가 생겨난다. 인생이 다 그렇지 않나. 침묵하던 묵자가 끄트머리에 한마디.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이 말의 의미가 심장하다. 선한 의지로 살면, 그만큼 좋게 살 확률도 높아지지 않을까.
공손저구가 그런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 새 한바탕의 짧은 꿈’. 그 문장이 나를 지탱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중략)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요령을 피우거나 잔꾀를 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한바탕 꿈처럼 지나간다.
남들은 4차 혁명이다. 뭐다 하며 부산을 떠는데 연극은 참 그대로다. 또 여전히 번거롭다. 긴 연습을 하고, 세트를 세우고, 어두운 곳에 관객을 가두고 굳이 조명을 켠다. 매일 같은 이야기의 반복. 그러나 거기에 엄연히 인간이 있다. 인생의 지혜와 어리석음이 있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땀과 가뿐 숨소리가 있다. 이것이 연극이 존재하는, 사람이 연극을 그리워하는 이유다. 그래서 연극은 내게 질리지 않는 보석과도 같다. 물질문명은 연극을 뒤로 제쳐두고 멀찍이 앞서갈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무대로 돌아온다. 날고 뛰어봤자 무대 안이다.
# 3. 여운의 잔상들
마냥 기쁘고 즐거운 것이 행복의 의미가 아니다. 그저 원한을 안 당하고 큰 슬픔이나 고통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행복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가끔씩 여운이 깨끗한 기분 좋은 쾌감들을 느껴나가는 것. 그렇게 꼭두각시의 무대에서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 새 한바탕의 짧은 꿈이 끝날 때가 되지 않을까?
원한을 피하려 해도 피치 못하게 원한을 당할 수도 있다. 그나마 원한을 피하는 방법으로는 내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한을 당하더라도 복수가 올바른 해결책은 아닐 수 있다는 것.
돈이 행복을 살 순 없지만 많은 불행의 씨앗은 돈이다.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평화롭기만을!
끝.